도둑을 도둑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Posted by 아바래기
2010. 6. 24. 06:30 소소한 일상 이야기


 무더위에 몸서리 치는 요즘 같은 계절이면 떠오르는 밤손님 한 분이 계십니다. 예전에 발냄새나는 빈집털이범에게 집 안이 홀라당 털린 적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 이번엔 그 도둑보다 좀 더 간 큰 도둑과의 만남에 관한 경험담입니다. 
 몇 년 전, 구체적으로 지금의 집으로 이사오기 전 우리 가족은 연립주택의 1층에서 살았습니다. 큰 아이가 배정받은 중학교와 살고 있던 집이 너무나 멀어서 부랴부랴 이사를 가게 된거라 그동안 1층에서 단 한번도 산 적이 없는데 그런 것 가릴 것 없이 무턱대고 이사를 와야만 했었던 상황이었죠. 이사온지 두 달 조금 넘은, 정말 더웠던 7월 초. 큰 딸이 시험공부를 한다고 기특하게도 밤을 새가며 공부를 하더군요. 남편은 출근을 위해서 일찍 잠이 들고 전 부엌에서 간단하게 아이가 먹을 야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딸아이에겐 좀 안 좋은 공부습관이 있었는데 바로 방 불을 끄고 스탠드불 하나 켜놓은 상태에서 공부를 하는, 딱 보기에도 눈이 나빠질만한 습관이었죠. 제가 몇 번 주의를 주었지만 딸아이는 이래야만 집중이 잘 된다고 굳이 그 방식을 고수했고 그 날도 마찬가지로 딸아이는 방불을 끄고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어라? 엄마 문이 움직이나봐! 부엌에서 한창 야식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던 저는 딸아이의 행설수설한 말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제 큰 딸은 평소에도 좀 엉뚱한 말을 많이했거든요. 그런데 딸이 계속 ‘어라’를 남발하며 문이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러기를 잠깐, 갑자기 딸의 입에서 상상도 못한 소리가 나오더군요. 

“엄마 도둑이야! 대머리 도둑이 들어오려고해!”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서 딸 아이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딸 아이 말대로 어느 대머리가 창문을 넘어 우리집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장으로 보이는 것들을 잔뜩 들고는 그 대머리 도둑은 우리집에 들어오려고 딸아이의 문을 뜯고 있었던 겁니다. 생초보인 것인지, 사람이 있건 없건 가리지 않는 흉악범인것인지! 집 구조상 부엌은 불이 켜저있어도 밖에선 티가 나지 않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나머지 방불이 다 꺼져있으니 모두 자고 있는거라 생각한 도둑이 딸아이 방 창문을 뜯어서 집에 침입하려고 한 모양인가 봅니다. 1m 거리도 안되는 짧은 거리를 두고 도둑과 대치한 저는 한참을 멍때리고 있다가 일단 ‘도둑이야!’라고 큰 소리로 외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으...응....으으음!”

 그 순간 정말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둑이야!’라는 이 짧은 말이 입에서 터져나오지 않은 것이죠. 저는 사람이 너무 겁에 질리거나 당황하면 말이 안 떨어진다는 소리가 이런거구나, 잠깐 착각에 빠졌죠. 진실은 바로 제가 도둑이 들기 며칠전 홈쇼핑에서 구입한 치아미백제품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전 어렸을 때나 아줌마가 된 지금이나 치과라면 질색을 하던 저는 차마 치과에는 가지 못하고 홈쇼핑에서 치아미백제품을 주문했습니다. 치아에 직접 약을 바르고 복싱 선수들이 사용하는 마우스피스 같은 것을 이에 낀 채 이십분 정도 있는 과정을 매일같이 반복하면 치아미백이 된다는 제품이었죠. 그 제품이 집에 온지 얼마 안된지라 열심히 치아미백제품을 사용있던 저는 도둑의 등장에 이에 물은 마우스피스의 정체를 까먹어버린 것이지요. 발음이 뭉개지는게 당연한 일인데 대체 왜 그런지 모르고 있었으니! 보고있던 딸아이도, 창문 밖 도둑도 어안이 벙벙해질 상황이었죠. 전 마우스피스를 차마 뺄 생각은 못하고 부엌으로 달려나가 후라이팬을 들었습니다. 그 사이  딸아이는 눈치껏 골아떨어진 남편을 깨우러 안방으로 피신했구요.

“으으으으으으!”

전 공포영화 속 좀비가 되어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무조건 후라이팬으로 그 대머리 도둑을 퇴치했습니다. 사실 퇴치랄 것도 없는데 제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후라이팬을 들고 달겨들자 식겁한 표정의 대머리 도둑이 미친듯 도망을 치더군요. 이미 상황이 종결된 후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방에서 나온 남편이 뒤늦게 밖으로 달려나갔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죠. 
 남편은 그 자리에서 급히 경찰을 불러서 순찰을 돌아줄 것을 요청했고, 그 다음날 바로 어지간한 기술자 아니고선 뜯을 수 없는 방범창을 방마다 달았습니다. 이로써, 겁없는 대머리 도둑과 ‘으으으’라는 괴성 밖에 지르지 못하는 아줌마의 대결이 쫑을 친 것이지요.

 뭐,사건은 좋게 해결됐고 그 뒤로 혹시나 그 도둑이 다시 침입하려할까,우리 가족이 우려했던 일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날 이후 딸아이가 만나는 친척들마다 우리 엄마는 ‘도둑을 도둑이라고 부르지도 못해’ 라면서 그 날의 경험달을 말해줘서 제가 한동안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었을 뿐이지요ㅎㅎㅎ...
 지금 생각해도 도둑을 도둑이라고 부르지 못했던 그 날의 상황은 위협적이기 보단 웃기고 허무한 기억으로 남네요. 아무튼 그 도둑 덕분에 단단히 질려버린 저는 고가의 돈을 주고 산 치아미백제품을 장농에 쳐박아두어야만 했답니다^^

  1. 사람이 극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정신줄을 놓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잘 대처하셨네요. ^^
    • 전 항상 이 상황에는 이렇게~ 저 상황에는 저렇게~
      머릿속으로 위기상황시 대처방법을 상상하곤 했는데
      막상 그 상황에 처하니까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구요ㅎㅎ
  2. 그래도 후라이팬을 들고 대비하시다니
    용기가 대단하시네요.
  3. 그러니깐 아바래기님은 말보단 행동이시군요 ㅎㅎ
    대단합니다.. 오히려 잘된거 같아요~ 소리질러봤자 도망만 갈테니
    후라이팬으로 한대 때리는게 더 낫죠 ㅎㅎㅎ
    • 앞으로 이런 일이 없어야 할 테지만
      만약 있다면 이번에 머리에 정통으로 후라이팬을 날려줘야겠습니다^^
  4. 그래두 침착하게 잘 대처하셨네요..
    다행이어요...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5. ㅋㅋㅋㅋㅋㅋ 상상을 하니 너무 웃깁니다. 도둑이 무서워서 도망간것 같은데요. 하하하....
  6. 도둑이 미수에 그쳤기 망정이지 자칫 큰 일 날 뻔하셨네요.
    더 이상 그런 일이 없기를 기원하겠습니다.
  7. 허헉..영화에서나 보던 이런일이 실제로...!!
  8. 큰일날 뻔 했군요..
    후라이팬의 힘인지...이바래기님의 힘인지...
    도망가는 도둑의 뒷 모습이 그려지네요........ㅎ
  9. 으하하 웬지 웃음이 나옵니다ㅋㅋ 큰일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네요ㅠ 그렇게 대놓고 들어오는 도둑이 있다니ㅠㅠ
  10. ㅋㅋㅋ 완전 웃었습니다^^ ㅎ
    근데 도둑이 완전 간도 크네요 ㅋㅋㅋㅋ
    넘 잘 보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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